2010년 회사에서 내게 업무용 노트북으로 당시로써는 거금이었던 300만원에 육박하는 최고급 모델이었던 SONY의 VAIO 라인업에서도 상위기종이었던 VPCZ115GK를 지급해줬었다.
그 날 이후로 난 이녀석과 함께 전세계를 함께 누볐었다.
실로 긴 시간동안 아프리카 대륙과 남미를 빼고 출장차 거쳐갔던 모든 국가들을 이녀석과 함께 했었는데...
수많은 공항의 검색대에서 꺼내어져 엑스레이 검사기를 통과했었고,
수많은 도시를 함께 누비며, 많은 바이어 회사의 회의실에서 꺼내어져 함께 업무를 보았고,
때로는 초대형 항공기의 캐빈에서, 때로는 쾌속선에서, 때로는 시골공항의 20인승 초소형 비행기에서 나와 함께 수출 역군으로써의 소임을 다했었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눈보라를 신기해 하던 녀석.
프랑크푸르트의 마인강변을 제집처럼 오갔던 녀석
ICE에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는 함부르크의 으슬으슬한 기후에 적응 못하던 녀석.
샹제리제 거리의 카페에서 괜히 일하는 척 하던 녀석.
런던의 피카딜리 써커스에서 뮤지컬 대사 다 알아듣는척 하던 녀석.
바르셀로나는 촌동네라 오기 싫다던 녀석.
중국은 갈때마다 뭐가 많이 바뀌어서 적응 못하던 녀석.
도쿄의 마쿠하리로 가는 전철이 짜증난다며 가까운 호텔에서 지내자고 투덜대던 녀석.
로스엔젤레스에서 괜히 들떠 있던 녀석.
태국은 언제와도 뭔가 마음이 편안하다며 업체별 미팅의 공백 시간에 호텔 수영장의 선배드 테이블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녀석.
싱가폴은 수십번을 갔어도 주인 잘못만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한번 못데려갔던게 못내 미안해지는 녀석.
말레이시아에서는 친구인 핸드폰과 헤어질뻔 하기도 했던 녀석.
업무용으로 오랜시간 잘 써왔던 고령의 노트북이 이제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힘겨운 숨을 내밷으며 쓰러져 잠이 든다.
최근들어 과하게 쿨링팬이 굉음을 내며 고온을 내기도 하고, 띄워놓은 엑셀창들이 먹통이 되며 꺼져버리기도 하는 증상을 보이더니...
급기야는 아마도 시스템 보호를 위해서 겠지만, 급격히 온도가 오르면서 쿨링팬이 최고 속도로 열기를 빼내다가 힘없이 전원이 툭 꺼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머릿속에는 "이 수십개의 폴더로 나누어 설정해놓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데이터가 쌓인 아웃룩을 어떻게 새로운 컴퓨터에 migration 하지?" 라는 생각과 함께 막막함에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나는..... 참 미련하게도 이 노병을 아주 조심조심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웃룩은 어쩔수 없이 상기 켜놓지만, 엑셀창은 2개이상 띄우지 않고, 크롬창을 열때면 다른걸 다 닫고..
그렇지만, 이 역전의 용사는 내가 아무리 조심히 사용해도 노쇠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나 싶었다.
여러차례 장문의 메일을 작성하는 와중에 임시저장으로 마우스를 조작하기도 전에 전원이 꺼져버리는 상황이 몇차례 벌어지고서야, 나는 부랴부랴 새 노트북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안녕 내 오랜 친구.
이제서야 뒤늦게 말하지만, 내 젊은 날들 전부를 온전히 함께 했던게 너라서 참 좋았었다.
10년이 넘은 나이에도 날 위해서 2시간이 넘는 배터리 구동 시간을 버텨줄만큼 훌륭하게 전장을 누벼줘서 고마웠다.
긴 세월동안 내가 그렇게 험하게 다뤄왔는데도 투덜대지 않고 묵묵히 잘 따라와줘서 참 고마웠다.
너보다 '훨씬'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친구를 만날수는 있어도, 결코 너만한 파트너를 다시 만나지는 못할거야.
이제 다시는 너와 함께 북미대륙을, 유럽을,아시아를, 중동의 사막을 누비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내 눈길이 닿는 서재 한켠에서 쉬도록 해.
고마웠어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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